왕관과 쟁기게임 시작

만약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가 이겼다면?

서기 312년 · 로마 제국 · 밀비우스 다리 전투 · 고친 날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서방을 차지했으며, 이 승리는 기독교 공인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막센티우스가 로마를 지켰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음 콘스탄티누스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일어난 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4제 통치는 305년 그가 물러난 뒤 무너졌습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에서 죽자 군대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세웠고, 같은 해 로마에서는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근위대의 지지로 자줏빛 옷을 입었습니다. 307년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가 차례로 로마를 치러 왔지만, 막센티우스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성벽 안에서 버텨 둘 다 물리쳤습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라인 강 수비대를 남겨 둔 채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세구시움을 함락하고, 타우리노룸 앞에서 막센티우스의 중장 기병을 무너뜨렸으며, 베로나를 포위해 그곳 지휘관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를 죽였습니다. 락탄티우스는 결전 전날 콘스탄티누스가 꿈에서 방패에 하느님의 표지를 그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에우세비오스는 훗날 황제가 맹세하며 들려준 이야기라며 하늘에 빛의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글씨가 나타났다고 씁니다.

막센티우스는 처음에는 성벽 안에 머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시빌라의 예언서가 「오늘 로마의 적이 죽는다」고 답하자 그는 10월 28일 군대를 이끌고 테베레 강을 건너 나왔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병이 그의 날개를 무너뜨렸고, 물러나던 군대가 밀비우스 다리 옆에 놓은 배다리로 몰렸습니다. 다리가 끊어지면서 막센티우스는 강에 빠져 죽었고, 이튿날 그의 머리가 창끝에 꽂혀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갈림길

막센티우스에게는 기다릴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성벽 덕에 포위군을 물리쳤고, 310년 아프리카의 반란을 진압한 뒤로 곡물선도 다시 로마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고대 저술가들이 전하는 병력은 막센티우스 쪽이 더 많았고, 알프스를 넘어온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겨울이 오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습니다. 그가 왜 성 밖으로 나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언, 즉위 기념일의 정치, 굶주림과 소요로 흔들리던 로마 시민의 압력이 모두 거론됩니다.

이 싸움이 기독교의 운명을 정했다는 말은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311년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으로 이미 법적으로 끝나 있었고, 막센티우스도 자기 영토에서 박해를 멈추고 로마 교회에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었습니다. 티머시 반스와 폴 스티븐슨 같은 역사가들은 그럼에도 황제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신을 자기 승리의 후원자로 내세운 것이 그 뒤 교회와 제국의 관계를 바꾸었다고 봅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312년 가을, 막센티우스는 성벽 안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곡물선이 로마를 먹였고, 알프스를 넘어온 군대는 테베레 강 북쪽의 비에 젖은 진영에서 굶주렸습니다. 11월, 근위대 기병이 배다리를 건너 진영을 덮쳤고, 콘스탄티누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너머로 물러났습니다. 로마는 막센티우스의 것으로 남고,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는 트레베리를 수도로 한 서방 로마 제국이 따로 섭니다.

게임의 바뀐 세계에서는 밀라노 칙령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콘스탄티누스로 시작한 플레이어는 313년 동방의 리키니우스가 이복누이 콘스탄티아와의 혼인을 청하는 것을 받고, 모젤 강가 트레베리에 붉은 벽돌 알현실을 세우며, 324년 리키니우스와 막센티우스가 일리리쿰을 두고 싸울 때 어느 편에 설지 고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를 둘러싼 다툼에는 끼어들 황제가 없어, 서방의 주교들이 당신에게 회의를 열어 달라고 합니다.

게임 밖에서 생각하면, 셋으로 나뉜 제국은 4제 통치가 무너진 뒤의 내전을 몇십 년 더 끌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박해받지 않았겠지만 황제가 앞장서는 종교가 되는 속도는 훨씬 느렸을 것이고, 니케아 공의회 같은 제국 단위의 회의도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이 결과는 다음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바이킹과 대관의 시대로 가문을 이어 가면 게임은 보스포로스의 비잔티온이 끝내 콘스탄티누스의 새 로마가 되지 못했고, 동방의 황제들이 니코메디아를 수도로 썼다고 알려 줍니다.

같은 시대의 다른 갈림길로는 바르 코크바 반란,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율리아누스, 아드리아노플이 있습니다. 율리아누스가 옛 신들을 되살리려 한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시작한 기독교 황실에 대한 반발이었으니, 밀비우스 다리가 없었다면 그 갈등의 모습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어진 갈림길

이 갈림길을 플레이하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정의 볼모 호민관 콘스탄티누스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니코메디아의 칙령을 고르세요. 306년 에보라쿰에서 서방을 얻은 뒤, 311년 「하늘의 표지」에서 그 표지를 군기에 금으로 두드리게 하거나 눈이 녹기 전에 알프스를 넘으면 콘스탄티누스가 이길 판세가 오르고, 한 해를 더 기다려 군대를 모으면 병력은 늘지만 막센티우스가 이길 판세가 오릅니다.

로마 제국 시대를 다른 자리에서 시작했다면, 311년 무렵 이탈리아에 살고 있을 때 막센티우스의 성벽 공사와 곡물 창고에 손을 보태거나, 서방에 살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의 원정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갈림길은 로마 제국을 플레이어가 다스리고 있지 않을 때 열립니다.

이 갈림길 플레이하기 → 시나리오 “니코메디아의 칙령” 시작하기 →

버튼을 누르면 로마 제국 시대가 선택된 채로 게임이 열립니다. 브라우저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고 계정도 필요 없습니다.

묻고 답하기

콘스탄티누스가 본 십자가 환시는 사실입니까?

가장 이른 기록인 락탄티우스는 꿈에서 방패에 표지를 그리라는 말을 들었다고만 쓰고, 하늘의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글씨는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에우세비오스가 쓴 전기에 나옵니다. 310년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의 아폴론 신전에서 환시를 보았다는 이교 찬양 연설도 있어, 학자들은 같은 경험이 여러 방식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논합니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합의한 이른바 밀라노 칙령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에게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가 된 것은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테살로니카 칙령 무렵입니다.

밀비우스 다리는 지금도 있습니까?

네. 로마 북쪽 테베레 강에 놓인 폰테 밀비오로, 기원전 2세기에 돌다리로 지어진 뒤 여러 번 고쳐졌습니다. 312년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무너진 곳은 그 옆에 임시로 놓은 배다리였다고 전합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44장; 에우세비오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1권; 313년과 321년의 라틴 찬양 연설; 조시모스, 『새 역사』 2권. 현대 연구: 티머시 반스(Timothy Barnes), Constantine and Eusebius; 폴 스티븐슨(Paul Stephenson), Constantine: Unconquered Emperor, Christian Victor.

반사실 역사는 근거를 갖춘 추측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실제 역사를,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는 게임에 담긴 것을 포함해 개연성 있는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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