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바르 코크바 반란이 성공했다면?
132~135년 유대아의 시몬 바르 코스바는 하드리아누스의 군단에 맞서 3년 넘게 버텼지만, 산성 베타르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반란이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70년 티투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무너뜨린 뒤로도 유대아는 로마의 가장 불안한 속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130년 무렵 동방을 돌며 예루살렘 폐허 위에 자기 씨족 이름을 딴 로마 식민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카시우스 디오는 이것이 반란의 원인이었다고 쓰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할례 금지를 듭니다. 할례 금지가 반란 전의 일인지 뒤의 일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132년 시몬 바르 코스바가 이끄는 반란이 터졌습니다. 랍비 아키바가 그를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라 불렀다는 전승이 있고, 그가 찍은 동전에는 「이스라엘 구원의 첫해」, 「예루살렘의 자유를 위하여」 같은 글귀와 「이스라엘의 나시(군주)」라는 칭호가 새겨졌습니다. 1960년대 사해 근처 동굴에서 발견된 그의 편지들은 그가 마을과 땅을 관리하는 꼼꼼한 지도자였음을 보여 줍니다. 반란군은 산지의 마을과 땅굴을 거점 삼아 로마군을 괴롭혔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타니아 총독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불러왔고, 여러 군단에서 분견대를 모았습니다. 세베루스는 들판에서 맞서지 않고 마을과 굴을 하나씩 둘러싸 굶기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135년 여름, 예루살렘 남서쪽의 산성 베타르가 함락되고 바르 코스바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디오는 요새 50곳과 마을 985곳이 무너지고 58만 명이 싸움에서 죽었다고 적었는데, 이 숫자는 과장일 수 있습니다. 황제는 속주의 이름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바꾸었고, 유대인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갈림길
로마는 이 전쟁에 놀랄 만큼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디오는 로마 쪽 손실도 커서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에서 「나와 군단은 건강하다」는 관례적인 첫머리를 빼야 했다고 전합니다. 이집트에 있던 제22군단 데이오타리아나가 이 무렵 기록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고 이 전쟁에서 무너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반란군이 예루살렘을 실제로 손에 넣었는지도 논쟁거리입니다. 동전의 글귀와 달리 예루살렘에서 나온 반란군 동전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역사가는 유대가 로마를 끝내 이길 수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국은 다른 국경에서 병력을 빼 올 수 있었고, 반란군은 산지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드리아누스는 즉위하자마자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내준, 지킬 수 없는 땅을 버릴 줄 아는 황제였습니다. 페터 셰퍼와 메나헴 모르 같은 연구자들은 반란의 규모와 지배 범위를 두고 서로 다른 그림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135년 겨울, 베타르를 둘러싼 포위선이 역병과 겨울비에 무너졌습니다. 세베루스는 군단을 해안으로 물렸고, 예루살렘과 유대의 산지는 시몬 바르 코스바의 손에 남았습니다. 그의 동전에는 「예루살렘의 자유를 위하여」라고 찍히고, 원로원은 황제가 동방에서 또 땅을 잃었다고 수군댑니다. 게임에서는 예루살렘과 그 둘레에 나시가 다스리는 유다라는 나라가 서고, 로마와 20년의 휴전을 맺습니다.
하드리아누스로 시작한 플레이어에게 이 세계는 다른 마지막 3년을 줍니다. 유대와 강화를 맺을지, 군단을 더 모을지, 해안 도시만 지킬지를 고르고, 원로원의 싸늘한 침묵을 견디며, 로마가 물러섰다는 소식에 캅카스 너머에서 내려온 알란족 기병을 카파도키아 총독 아리아노스에게 맡깁니다. 알란족의 침입과 아리아노스의 방어는 실제로도 135년 무렵의 일입니다. 반쯤 지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의 퇴역병들은 받기로 한 땅을 내놓으라 하고,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다시 쌓는다는 소식이 옵니다.
게임 밖에서 보면, 살아남은 유대는 마카베오 시대의 하스몬 왕국처럼 강대국 사이의 작은 나라로 버텼을 것입니다.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서 그 독립이 몇 세대를 갔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교의 중심이 갈릴래아로 옮겨 가 랍비들이 미쉬나를 엮는 과정은 실제와 매우 다르게 흘러갔을 것입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이 갈림길은 로마 제국 시대 초반에 있지만, 그 기억은 다음 시대까지 갑니다. 바이킹과 대관의 시대로 가문을 이어 가면 게임은 베타르가 무너지지 않은 세계였음을 알려 줍니다. 유대의 산지에는 로마의 길보다 오래된 이름들이 남아 있습니다.
같은 시대의 다른 갈림길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르코만니아와 밀비우스 다리가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바르 코크바 반란 뒤 로마는 이 지역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라 불렀고, 팔라이스티나라는 이름은 비잔티움 시대의 속주 이름으로 이어졌습니다.
-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것 바이킹과 대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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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년 하드리아누스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방벽의 황제를 고르세요. 브리타니아의 방벽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132년 바르 코스바의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134년 「베타르로 가는 길」에서 세베루스에게 시간과 군단을 모두 내주거나 항복하는 마을에 목숨을 약속하면 진압 쪽 판세가 오르고, 율법을 가르치는 자를 모두 잡아들이게 하면 오히려 반란이 거세질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를 다른 자리에서 시작했다면 역사의 흐름 이야기 바르 코크바 반란에서 원정 분견대나 군수 계약 쪽에 서면 로마 편에 힘을 보탭니다. 134년 무렵 동방 속주에 살고 있다면 포위군에 곡식과 노새를 대거나, 반대로 밤길로 산성에 곡식을 나르거나 쫓기는 마을 사람들을 숨겨 줄 수 있습니다. 이 갈림길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을 때만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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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 코크바와 바르 코스바는 같은 사람입니까?
네. 동굴에서 나온 편지와 동전에 적힌 본래 이름은 시몬 바르 코스바이고,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는 메시아 기대를 담은 별명입니다. 뒤의 랍비 문헌에는 거짓말쟁이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지바라는 이름도 나옵니다.
베타르는 언제 함락되었습니까?
135년 여름으로 보며, 유대 전승은 그날을 성전이 무너진 날과 같은 아브월 9일로 기억합니다. 베타르는 지금의 예루살렘 남서쪽 바티르 마을 근처의 산성 유적입니다.
반란 뒤 유대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속주의 이름이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바뀌었고, 유대인은 예루살렘, 곧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은 갈릴래아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200년 무렵 미쉬나가 편찬되었습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69권;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4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하드리아누스 전」; 나할 헤베르 동굴의 바르 코스바 편지. 현대 연구: 페터 셰퍼(Peter Schäfer) 엮음, The Bar Kokhba War Reconsidered; 메나헴 모르(Menahem Mor), The Second Jewish Revolt; 앤서니 버얼리(Anthony Birley), Hadrian: The Restless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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