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과 쟁기게임 시작

만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니아 속주를 세웠다면?

서기 180년 · 로마 제국 · 마르코만니 전쟁 · 고친 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원정 중에 죽었고, 아들은 강화를 맺었습니다. 그가 살아남았다면 로마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병합했을지도 모릅니다.

물음 로마는 도나우 너머에 새 속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일어난 일

마르코만니 전쟁은 2세기에 로마가 도나우 강 상류에서 치른 가장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170년 무렵 지금의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서부에 살던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이 국경을 뚫고 이탈리아 북부의 아퀼레이아를 포위하고 오피테르기움을 불태웠습니다. 이민족 약탈자가 이탈리아까지 들어온 것은 수백 년 만에 처음이었고, 그것도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제국이 약해지던 때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0년대 대부분을 도나우 강가에서 보내며 카르눈툼 같은 기지를 거점으로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그리고 헝가리 평원의 사르마티아계 야지게스족과 싸웠습니다. 179년에는 로마군이 콰디족 땅 깊숙한 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트렌친(고대의 라우가리키오)의 바위에 새겨진 비문은 그곳에 군단 분견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고고학자들은 모라비아의 무쇼프에서 로마의 시설을 찾아냈습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마르쿠스는 마르코만니아와 사르마티아라는 두 속주를 새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는 180년 3월 17일 빈도보나 또는 시르미움에서 숨을 거두었고, 열아홉 살의 아들 콤모두스는 서둘러 강화를 맺었습니다. 부족들은 포로를 돌려보내고 곡물과 신병을 바치며 모일 수 있는 장소에 제한을 받아들였고, 강 북쪽의 로마 수비대는 철수했습니다. 도나우는 그대로 국경으로 남았습니다.

갈림길

결정적인 순간은 전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마르쿠스는 쉰여덟 살 무렵이었고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아 왔습니다. 그가 몇 계절만 더 살았다면, 179년에 이미 진행 중이던 점령은 70년 전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에서 그랬듯 항구적인 속주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로 돌아가고 싶었던 콤모두스는 비용이 덜 드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계획이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후대에 쓰였고 믿기 어려운 대목이 많은 사료이며, 역병 뒤에 사람도 돈도 모자랐던 로마가 도나우 북쪽의 숲을 지킬 수 있었을지 의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반면 마르쿠스의 전기를 쓴 앤서니 버얼리 같은 이들은 속주 계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179년 점령의 규모를 근거로 듭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아버지의 업적을 내버렸다며 콤모두스를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이 강화를 파멸적인 전쟁 뒤의 합리적인 타결로 보다 너그럽게 평가합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황제는 그해 봄의 열병을 이겨 냈고, 군단은 겨울 진지를 강 북쪽에 그대로 두었으며, 보헤미아의 숲에 측량꾼과 도로가 들어갔고, 원로원은 마르코만니아 속주의 설치를 승인했습니다.

게임 밖에서 생각해 보면, 로마의 보헤미아는 있을 법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보헤미아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가다 카르파티아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지는 국경은 곳에 따라 더 길기도 하고 더 짧기도 했을 것이며, 제국이 간신히 내줄 수 있을 만한 군단 여럿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로마인의 정착이 거의 없었던 땅에 로마의 도로와 도시, 그리고 훗날 교회가 퍼졌을 것이고, 보헤미아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야 했을 테니 국경의 다른 곳에 압력을 더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코만니아가 수십 년 안에 다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키아도 270년대에 포기되었습니다. 속주는 그 뒤를 받치는 군대와 국고만큼만 튼튼하고, 3세기는 그 둘을 한계까지 시험하게 됩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게임에서는 속주가 하나 늘면 제국이 쪼개지기 어려워집니다. 마르코만니아가 있으면 274년에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가 따로 살아남을 확률이 낮아집니다.

가문을 바이킹과 대관의 시대로 이어 가면 세계가 그 일을 기억합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는 800년 시대를 이미 기독교 땅으로, 로마 시대의 도로와 교회를 갖춘 채 시작하고, 프라하도 조금 더 발전해 있습니다.

이어진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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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시대(117년)로 시작하거나, 전쟁이 한창이던 167년에 시작하는 시나리오 도나우의 겨울을 고르세요. 역사의 흐름 이야기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황제의 군단 편에 서면 속주 설치를, 강 건너 부족 편에 서면 그들의 자유를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178년에는 진지 주변의 사건에서 로마 측량꾼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요새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이 갈림길은 당신의 세계에서 마르코만니족이 아직 보헤미아, 모라비아, 상헝가리 가운데 한 곳을 차지하고 있을 때만 일어납니다. 이곳에서는 로마의 압도적인 힘이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습니다. 역사는 고집이 세고, 당신의 기여는 로마 쪽에서 땅을 다스릴 때 가장 큰 힘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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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정말 보헤미아를 병합하려 했습니까?

명시적인 기록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뿐이며, 그는 마르코만니아와 사르마티아를 속주로 삼고 싶어 했다고 전합니다. 믿기 어려운 사료이지만, 고고학 자료는 179~180년에 대규모 로마군이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의 땅 깊숙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는 적어도 병합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콤모두스는 왜 강화를 맺었습니까?

전쟁은 10년 넘게 이어졌고, 제국은 역병으로 약해져 있었으며, 새 황제는 로마에서 자기 자리를 다져야 했습니다. 강화로 로마는 곡물과 신병을 얻고 포로를 돌려받았으며, 도나우 국경은 여러 해 동안 조용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디에서 죽었습니까?

고대 사료마다 다릅니다. 빈도보나(빈)와 시르미움(세르비아의 스렘스카미트로비차)이 모두 거론되며, 날짜는 180년 3월 17일입니다.

왕관과 쟁기에서 마르코만니아를 속주로 만들 수 있습니까?

네, 당신의 게임에서 이 갈림길이 일어난다면 가능합니다. 마르코만니 전쟁 이야기에서 황제의 군단 편에 서서 부족들과 싸우세요. 로마 쪽에서 다스리는 땅이 넓을수록 당신의 기여가 판세를 더 크게 움직입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72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마르쿠스 전」. 현대 연구: 앤서니 버얼리(Anthony Birley), Marcus Aurelius: A Biography;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4장.

반사실 역사는 근거를 갖춘 추측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실제 역사를,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는 게임에 담긴 것을 포함해 개연성 있는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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