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이 성공했다면?
기원전 413년 아테네의 대원정군은 시라쿠사 앞에서 전멸했고, 이 패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흐름을 뒤집었습니다. 시라쿠사가 성문을 열었다면 그리스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기원전 415년 여름, 아테네는 니키아스의 평화로 잠시 멈춘 펠로폰네소스 전쟁 한가운데에서 시칠리아로 대원정군을 보냈습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삼단노선 134척과 중장보병 5,100명이었습니다. 명분은 동맹시 에게스타를 돕는 것이었지만, 민회를 움직인 것은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리스계 도시 시라쿠사를 꺾고 섬 전체를 손에 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장군은 신중한 니키아스, 젊고 야심만만한 알키비아데스, 노련한 라마코스 셋이었습니다.
출발 직전 아테네 곳곳의 헤르메스상이 하룻밤 사이에 훼손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신성 모독 혐의로 소환되자 스파르타로 달아났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에 시라쿠사로 장군을 보내고 아티카의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쌓으라고 권했습니다. 기원전 414년 아테네군은 시라쿠사 뒤쪽의 에피폴라이 고원을 차지하고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을 거의 다 쌓았습니다. 라마코스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때 스파르타의 길리포스가 도착해 아테네의 성벽을 가로지르는 맞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413년 데모스테네스가 삼단노선 73척의 증원 함대를 이끌고 왔지만, 에피폴라이를 노린 밤 공격은 혼란 속에 실패했습니다. 철수가 결정된 날 밤 월식이 일어나자 니키아스는 점쟁이들의 말에 따라 출발을 늦추었고, 그사이 함대는 큰 항구에서 갇혀 무너졌습니다. 육로로 달아나던 군대는 아시나로스 강가에서 붙잡혔고,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처형되었으며, 포로 7천 명은 시라쿠사의 채석장에 갇혔습니다. 같은 봄 스파르타는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쌓았습니다.
갈림길
원정은 적어도 두 번 성공 직전까지 갔습니다. 투키디데스는 길리포스가 도착하기 직전 시라쿠사 사람들이 전쟁을 끝내는 문제를 놓고 민회를 열려던 참이었다고 씁니다. 코린토스의 공길로스가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두 번째는 데모스테네스의 밤 공격으로, 아테네군은 고원 위까지 올라갔다가 어둠 속에서 대열을 잃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이때 맨 먼저 버틴 것이 보이오티아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패배가 우연만은 아니었다는 견해도 많습니다. 투키디데스 자신은 원정의 실패를 계획의 잘못보다 본국이 원정군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지도자들이 서로 다툰 탓으로 보았습니다. 도널드 케이건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니키아스의 망설임과 알키비아데스의 소환을 결정적인 실수로 꼽습니다. 반면 시라쿠사를 차지했더라도 아테네가 바다 건너 큰 섬을 오래 다스릴 수 있었을지, 카르타고와 맞부딪치지 않았을지 의심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기원전 413년 여름, 데모스테네스의 증원 함대가 닿은 지 열흘 만에 에피폴라이의 시라쿠사 성벽이 밤 공격에 무너졌습니다. 길리포스는 전사했고, 굶주린 시라쿠사가 오르티기아의 문을 열었습니다. 시칠리아의 밀과 배가 아테네의 것이 되었고, 스파르타는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쌓으려던 계획을 접습니다. 게임에서 시라쿠사는 아테네의 봉신이 되고, 아테네 군대는 커지며, 스파르타의 군대는 줄어듭니다.
그 뒤 게임의 바뀐 세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듬해 이오니아 동맹시들의 반란 모의가 사그라들고 페르시아의 총독 티사페르네스는 스파르타 사절을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기원전 411년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이고, 409년 카르타고가 셀리누스에 상륙하자 시칠리아를 쥔 아테네와 처음으로 맞붙습니다. 406년 두 세력은 할리코스 강을 경계로 섬을 나누고, 405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바다 제국을 인정하는 평화를 청합니다. 카르타고의 셀리누스 공격은 실제 역사에서도 기원전 409년에 일어났습니다.
아테네가 이긴 세계는 아테네에도 낯선 세계입니다. 게임에서는 기원전 399년 일흔 살의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아고라에서 젊은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를 법정에 세우자는 고발장을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아테네는 보이오티아로 손을 뻗어 393년 타나그라 싸움 뒤 보이오티아 연맹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382년에는 테베에 아테네식 민주정과 수비대를 둡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자였던 아테네가 이번에는 그리스의 패자가 됩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이 갈림길은 고전 그리스 시대의 뒤 갈림길들을 통째로 바꿉니다. 아테네가 시라쿠사를 차지한 세계에서는 테베가 스파르타를 꺾을 기회가 오지 않으므로 레욱트라의 갈림길이 열리지 않고, 키루스의 반란과 쿠낙사도 실제와 다르게 흘러가 쿠낙사의 갈림길 역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케도니아는 그래도 일어섭니다. 게임에서 기원전 359년 필리포스가 왕이 되는 것은 같지만, 이 세계의 필리포스는 테베가 아니라 아테네에서 인질로 자라며 이피크라테스의 경보병을 보고 배운 사람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필리포스는 레욱트라 뒤 테베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에파미논다스의 군대를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 영향을 받는 갈림길 만약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가 이겼다면?, 만약 키루스가 쿠낙사에서 살아남았다면?
이 갈림길을 플레이하기
고전 그리스 시대(기원전 431년)로 시작하거나, 원정이 떠나는 기원전 415년에 알키비아데스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헤르메스상의 밤을 고르세요. 알키비아데스로서 소환에 맞서 원정에 남거나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돌아오면 원정이 이길 쪽에, 스파르타로 건너가 길리포스와 데켈레이아를 권하면 실제 역사 쪽에 힘을 보탭니다. 보이오티아의 귀족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카드메이아의 아들에서도 이 갈림길을 맞습니다.
역사의 흐름 이야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 편에 서면 원정의 성공을, 펠로폰네소스 동맹 편에 서면 실제 결과를 밀어붙입니다. 기원전 414년에는 아테네 쪽이라면 데모스테네스의 증원 함대에 자원하거나 삼단노선의 의장비를 댈 수 있고, 반대쪽이라면 시라쿠사로 가는 보이오티아의 300명에 낄 수 있습니다. 판세는 아테네와 시라쿠사·스파르타·코린토스의 힘을 견주어 정해지며, 아테네가 이미 무너졌다면 갈림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 갈림길 플레이하기 → 시나리오 “헤르메스상의 밤” 시작하기 →
묻고 답하기
시칠리아 원정군은 얼마나 컸습니까?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기원전 415년 첫 원정군은 삼단노선 134척과 중장보병 5,100명, 그리고 궁수와 경보병이었고, 413년 데모스테네스가 삼단노선 73척을 더 이끌고 왔습니다. 노잡이까지 합치면 수만 명이 시칠리아로 건너갔으며, 그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왜 니키아스는 철수를 늦추었습니까?
기원전 413년 8월 말 철수하기로 한 날 밤에 월식이 일어났고, 니키아스는 점쟁이들의 말대로 27일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사이 시라쿠사 사람들은 큰 항구의 입구를 막았고, 아테네 함대는 탈출에 실패했습니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로 아테네가 바로 졌습니까?
아닙니다. 아테네는 함대를 다시 만들어 9년을 더 싸웠고 키지코스 같은 해전에서 이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오니아 동맹시들의 반란과 페르시아의 스파르타 지원이 이어졌고,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함대를 잃은 뒤 404년에 항복했습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6~7권; 플루타르코스, 「니키아스 전」·「알키비아데스 전」. 현대 연구: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The Peace of Nicias and the Sicilian Expedition; 피터 그린(Peter Green), Armada from Ath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