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키루스가 쿠낙사에서 살아남았다면?
기원전 401년 페르시아 왕자 키루스는 그리스 용병 1만여 명을 이끌고 형의 왕좌를 노렸다가 쿠낙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가 살아서 왕중왕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다리우스 2세의 둘째 아들 키루스는 열여섯 살 무렵부터 소아시아의 총독으로 사르디스에 있으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막바지에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에게 함대를 꾸릴 돈을 대 주었습니다. 기원전 404년 아버지가 죽고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대관식 무렵 형을 해치려 했다는 고발을 받았다가 어머니 파리사티스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르디스로 돌아간 키루스는 피시디아의 산적을 친다는 핑계로 그리스 용병을 모았습니다.
기원전 401년 봄 사르디스를 떠난 군대는 킬리키아 고개와 시리아를 지나 유프라테스를 따라 바빌로니아까지 내려갔습니다. 크세노폰은 행군 도중의 열병식에서 그리스 중장보병이 10,400명, 경보병이 2,500명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해 9월 바빌론에서 멀지 않은 쿠낙사에서 대왕의 군대를 만났을 때, 스파르타 출신 장군 클레아르코스는 오른쪽 날개를 유프라테스 강에 붙인 채 왕이 있는 한가운데로 움직이라는 키루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대열은 맞은편 페르시아군을 무너뜨리고 멀리까지 쫓아갔습니다.
그사이 키루스는 기병 600을 이끌고 형의 친위대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왕의 가슴받이를 뚫어 상처를 입혔지만, 곧 눈 밑에 투창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왕의 상처를 치료한 사람은 페르시아 궁정의 그리스인 의사 크테시아스였습니다. 이긴 쪽에 서 있던 그리스인들은 하룻밤 사이에 적지 한가운데 남겨졌고, 장군들이 티사페르네스에게 속아 붙잡힌 뒤에는 크세노폰 등을 새 장군으로 뽑아 카르두코이의 산지와 아르메니아의 눈을 지나 이듬해 흑해 연안의 트라페주스에 닿았습니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가 전하는 「만 명의 귀환」입니다.
갈림길
쿠낙사는 그리스 쪽에서 보면 이긴 싸움이었습니다. 그리스 용병들은 거의 잃은 사람 없이 맞은편을 무너뜨렸고, 대왕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결과를 가른 것은 키루스 자신의 돌격이었습니다. 크세노폰은 그가 「저 사람이 보인다」고 외치며 형에게 달려들었다고 전하고, 플루타르코스는 크테시아스를 인용해 그 순간을 자세히 그립니다. 클레아르코스가 명령대로 대열을 한가운데로 돌렸다면 왕의 친위대가 먼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비판입니다.
그러나 키루스가 살아남았더라도 왕위가 저절로 그의 것이 되었을지는 따져 볼 일입니다. 크세노폰이 적은 수십만, 백만이 넘는 군대는 과장이지만, 대왕의 군대가 키루스의 군대보다 훨씬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피에르 브리앙 같은 페르시아사 연구자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력이 귀족과 총독들의 충성에 달려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도 어머니 파리사티스가 작은아들 편이었고, 키루스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이름났다는 점은 그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키루스는 형의 친위대를 보고도 돌격하지 않았고, 그리스 용병들이 맞은편을 무너뜨리고 돌아와 왕의 한가운데를 찔렀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이레 뒤 바빌론의 문이 열렸습니다. 키루스는 그리스인 하나하나에게 금관을 약속한 대로 내주었습니다. 실제로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바빌론에 닿으면 그리스인마다 금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적었습니다.
게임의 바뀐 세계에서는 사르디스 총독 자리를 키루스의 벗 아리아이오스가 맡고, 스미르나와 카리아를 비롯한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총독 없이 대왕에게 공납만 바치는 자치 동맹이 됩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는 동맹을 맺습니다. 이듬해 태후 파리사티스는 키루스의 반역을 처음 고발했던 티사페르네스를 넘겨받아 죽이고, 기원전 398년 스파르타의 새 왕 아게실라오스가 동맹을 다시 맹세하며, 스파르타 함대는 페르시아의 은으로 노잡이 급료를 줍니다.
그리스 본토에는 실제보다 조용한 시대가 옵니다. 스파르타에 맞서려던 테베와 아테네의 사절은 수사에서 빈손으로 돌아오고, 페르시아의 금이 오지 않으니 코린토스 전쟁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테네의 긴 성벽은 무너진 채 남습니다. 기원전 391년 키루스의 그리스 용병들이 이집트를 다시 정복하고, 386년의 칙서는 「키루스의 평화」라 불립니다. 키루스는 기원전 358년 예순여섯 살로 바빌론에서 죽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죽은 것도 같은 해입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이 갈림길은 시칠리아 원정이 실제대로 실패한 세계에서만 일어납니다. 아테네가 시라쿠사를 차지한 세계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막바지의 판이 달라 키루스의 반란 자체가 실제와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만 명의 귀환은 페르시아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믿음을 그리스에 퍼뜨렸습니다. 이소크라테스는 이를 근거로 그리스인들이 힘을 모아 페르시아를 치자고 했고, 기원전 396년 아게실라오스의 아시아 원정과 두 세대 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키루스가 왕이 된 세계에서는 그리스인이 페르시아를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섬길 왕의 친위대로 여기게 됩니다.
- 영향을 준 갈림길 만약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이 성공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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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1년 크세노폰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만 명의 귀환을 고르세요. 이 시나리오에서는 쿠낙사 장면이 갈림길의 판정을 직접 내립니다. 타르소스에서 더 가지 않겠다는 병사들을 다독이면 키루스 쪽 판세가 조금 오르고, 쿠낙사의 들판에서 「왕을 보셔도 뛰어들지 마십시오」 하고 키루스 곁에 남으면 크게 오르며, 클레아르코스에게 달려가 대열을 한가운데로 돌리자고 해도 판세가 오릅니다. 프록세노스의 대열로 돌아가 창을 들면 역사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이 갈림길이 열리지 않고, 고전 그리스 시대를 시나리오 없이 시작했을 때만 보통의 갈림길로 열립니다. 그때는 기원전 402년 사르디스의 모병관이 그리스 사람에게 찾아오며, 키루스의 용병대에 들어가면 키루스 쪽에 힘을 보탭니다. 시칠리아 원정이 성공한 세계라면 이 갈림길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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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낙사 전투는 언제, 어디에서 벌어졌습니까?
기원전 401년 9월, 지금의 이라크, 고대 바빌론 북쪽의 유프라테스 강가 쿠낙사에서 벌어졌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나바시스』는 어떤 책입니까?
아테네 사람 크세노폰이 키루스의 원정과 그리스 용병들의 귀환을 기록한 책으로, 제목은 「내륙으로 올라감」이라는 뜻입니다. 크세노폰은 이 책을 테미스토게네스라는 이름으로 펴냈다고 전하며, 바다를 본 병사들이 「바다다, 바다다!」 하고 외친 장면이 유명합니다.
만 명 가운데 몇 명이 살아 돌아왔습니까?
크세노폰은 흑해 연안의 케라수스에서 다시 세어 보니 중장보병이 8,600명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쿠낙사 직전 중장보병과 경보병을 합쳐 1만 3천 명 가까이였던 것과 비교하면, 1년 가까운 귀환 길에서 상당수를 잃은 셈입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크세노폰, 『아나바시스』 1~4권; 플루타르코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전」(크테시아스 인용); 디오도로스, 『역사총서』 14권. 현대 연구: 피에르 브리앙(Pierre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로빈 레인 폭스(Robin Lane Fox) 엮음, The Long M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