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720년 존 로의 체제가 버텼다면?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의 왕립은행과 인도회사는 1720년 프랑스를 휩쓴 미시시피 거품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의 지폐가 공황을 넘겼다면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1715년 루이 14세가 죽었을 때 프랑스 왕실은 수십억 리브르의 빚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섭정 오를레앙 공 필리프는 에든버러 출신의 도박사이자 화폐 이론가 존 로에게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1694년 런던에서 결투로 사람을 죽이고 탈옥한 이력이 있던 로는 1716년 일반은행을 세웠고, 이 은행은 1718년 왕립은행이 되었습니다. 그는 루이지애나 무역권을 가진 서방회사를 세운 뒤 동인도회사 등을 합쳐 1719년 인도회사로 키웠고, 왕의 빚을 회사 주식으로 바꾸는 거대한 계획을 밀어붙였습니다.
주식은 1719년 여름부터 폭등했습니다. 액면 500리브르의 주식이 그해 말 1만 리브르 가까이 올랐고, 파리의 캥캉푸아 거리는 밤낮으로 투기꾼들로 붐볐습니다. 「백만장자」라는 말이 이때 생겼습니다. 로는 1720년 1월 재무총감이 되었고, 은행과 회사를 합치고, 금화와 은화를 많이 갖지 못하게 하는 칙령까지 내렸습니다. 3월에는 주식 값을 9천 리브르로 묶고 은행이 그 값에 사들이게 했는데, 그만큼 지폐가 새로 쏟아졌습니다.
1720년 5월 21일, 지폐와 주식의 값을 단계적으로 절반으로 깎는다는 칙령이 나왔다가 엿새 만에 거두어졌습니다. 이미 믿음은 무너졌습니다. 여름 내내 비비엔 거리의 은행 앞에서 사람들이 지폐를 금으로 바꾸려다 깔려 죽는 일까지 일어났고, 지폐는 가을에 돈으로서의 힘을 잃었습니다. 12월, 로는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갔고, 1729년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죽었습니다. 뒷수습을 맡은 파리스 형제는 투자자들의 청구권을 크게 깎아 정리했습니다.
갈림길
로의 체제가 처음부터 사기였다고 보는 견해는 오늘날 많지 않습니다. 앙투안 머피와 프랑수아 벨드 같은 경제사가들은 왕의 빚을 주식으로 바꾸고 지폐로 금속 화폐의 부족을 메우려 한 생각 자체는 오늘날의 중앙은행과 국채 관리를 앞선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문제는 속도와 설계였습니다. 특히 1720년 3월 주식 값을 고정해 은행이 무제한으로 사들이게 한 결정이 주식을 사실상 지폐로 바꾸어 통화량을 폭발시켰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정치도 결과를 갈랐습니다. 파리 고등법원과 전통적인 금융가인 파리스 형제는 처음부터 로를 적대했고, 섭정은 끝까지 그를 감쌌지만 5월 칙령의 혼란 뒤에는 그를 지켜 낼 수 없었습니다. 같은 해 런던의 남해 회사 거품도 무너진 것을 보면, 1720년은 유럽 전체가 새로운 금융을 배우며 대가를 치른 해였습니다. 로가 인쇄기를 일찍 멈추고 주식 값을 놓아주었다면 결과가 달랐으리라는 반사실은 경제사가들 사이에서도 실제로 논의됩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1720년 봄, 존 로는 인쇄기를 멈추고 주식 값을 정해 은행이 사고팔게 했습니다. 고등법원과 파리스 형제가 몰아세웠지만 섭정은 끝까지 그의 편에 섰습니다. 주가는 절반쯤 내려앉은 뒤 그 자리에서 멈췄고, 왕립은행의 지폐는 금화와 나란히 쓰이는 돈으로 남았습니다. 게임에서는 프랑스의 군대가 늘고 파리가 조금 더 발전하며, 런던의 남해 회사 주가만 무너졌다는 소식이 돕니다. 마르세유에 마지막 대역병이 상륙하는 것은 두 세계가 같습니다.
그 뒤 바뀐 세계에서는 1722년 미시시피 강 하구의 누벨오를레앙이 루이지애나의 도읍이 되고, 인도회사의 배가 알자스와 라인 강가의 농부 가족들을, 그리고 노예선을 함께 실어 옵니다. 1726년 재정을 맡은 플뢰리 추기경은 로를 좋아하지 않지만 왕립은행을 닫지 않고, 프랑스 국채의 이자는 네덜란드보다 낮아집니다. 1744년 무렵에는 은행이 찍은 국채로 브레스트와 툴롱의 조선소가 쉬지 않고 돌아,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군과 비슷한 수의 전열함을 띄웁니다. 누벨오를레앙이 1722년 루이지애나의 도읍이 된 것은 실제 역사와 같습니다.
존 로로 시작한 플레이어에게는 다른 결말이 기다립니다. 은행이 버틴 봄, 누벨오를레앙, 왕이 내는 1데니에, 1723년 섭정의 죽음, 평화의 장부를 지나 방돔 광장의 노인으로 늙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실제 역사에서 로 체제의 붕괴는 프랑스에 은행과 지폐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남겼습니다. 18세기 내내 왕실은 징세 청부인과 관직 판매와 비싼 빚에 기댔고, 영국이 잉글랜드 은행과 국채 시장으로 전쟁 비용을 싸게 빌리는 동안 프랑스는 더 비싸게 빌렸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이 재정의 차이를 1789년 혁명으로 이어진 왕실 파산의 먼 뿌리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프랑스 은행이 세워진 것은 1800년입니다.
같은 시대의 다른 갈림길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한 왕관을 나눠 쓸 것인가를 묻는 스페인 계승 전쟁이 있습니다. 로가 물려받은 빚더미의 큰 부분이 바로 그 전쟁의 비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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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 존 로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캥캉푸아 거리를 고르세요. 1719년 가을 「세 번째 발행」에서 찍을 수 있는 만큼 주식과 지폐를 찍으면 금화는 들어오지만 체제가 무너질 판세가 오르고, 발행을 멈추고 은행권의 양을 묶으면 체제가 버틸 판세가 크게 오르며, 남은 왕의 빚을 3퍼센트 국채로 바꾸어도 판세가 오릅니다.
태양왕과 바로크의 시대를 다른 자리에서 시작했다면 역사의 흐름 이야기 미시시피와 남해의 거품에서 미시시피 회사 쪽에 서면 체제가 버티는 쪽에 힘을 보탭니다. 1719년 프랑스 사람이나 프랑스 가까이에 사는 사람에게는 「왕립은행의 창구」가 찾아옵니다. 지폐와 주식을 그대로 들고 버티면 체제 쪽에, 지폐를 창구에 내밀고 금화를 받으면 붕괴 쪽에 힘이 실립니다. 이 갈림길은 프랑스를 플레이어가 다스리고 있지 않을 때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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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거품이란 무엇입니까?
1719~1720년 존 로의 인도회사(흔히 미시시피 회사라 부름) 주식이 폭등했다가 폭락한 사건입니다. 액면 500리브르의 주식이 1만 리브르 가까이 올랐다가, 1720년 5월 이후 무너져 많은 투자자가 재산을 잃었습니다. 같은 해 런던의 남해 회사 거품과 함께 근대 초 금융 위기의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
존 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720년 12월 프랑스를 떠나 브뤼셀과 여러 도시를 떠돌았고, 런던에서 1694년 결투 사건의 사면을 받기도 했습니다. 1729년 베네치아에서 폐렴으로 죽었으며, 재산은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누벨오를레앙은 존 로와 관계가 있습니까?
네. 뉴올리언스는 1718년 로의 서방회사 아래에서 비엔빌이 세웠고, 회사는 루이지애나로 이주민을 보내려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습니다. 1722년에는 루이지애나의 도읍이 되었습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존 로, 『화폐와 교역에 관한 고찰』(Money and Trade Considered, 1705); 생시몽, 『회상록』. 현대 연구: 앙투안 머피(Antoin Murphy), John Law: Economic Theorist and Policy-Maker; 프랑수아 벨드(François Velde), 「Government Equity and Money: John Law's System in 1720 France」; 재닛 글리슨(Janet Gleeson), The Money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