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916년 베르됭에서 독일이 이겼다면?
1916년 2월부터 열 달 동안 베르됭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70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지만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베르됭이 무너졌다면 대전쟁은 어떻게 끝났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1915년 말 서부 전선은 스위스에서 북해까지 참호로 굳어 있었습니다. 독일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로렌의 뫼즈 강가에 튀어나온 요새 도시 베르됭을 치기로 했습니다. 1916년 2월 21일, 천 문이 넘는 대포의 포격과 함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2월 25일에는 베르됭 요새들 가운데 가장 큰 두오몽 요새가 거의 싸움 없이 독일군 소부대에 넘어갔습니다. 대포를 다른 전선으로 빼낸 뒤 수비대가 몇십 명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필리프 페탱이 지휘를 맡았고, 바르르뒤크에서 베르됭으로 가는 좁은 도로 하나로 화물차가 밤낮없이 병사와 탄약을 실어 날랐습니다. 작가 모리스 바레스가 「신성한 길」이라 부른 길입니다. 프랑스군은 사단을 번갈아 투입했고, 육군의 대부분이 한 번씩 베르됭을 거쳐 갔습니다. 6월 7일 물이 떨어진 보 요새가 항복했고, 6~7월 독일군은 플뢰리와 수빌 요새까지 밀고 들어와 도시를 몇 킬로미터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6월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와 7월 1일 시작된 영국·프랑스의 솜 공세가 독일의 힘을 빼 갔습니다. 8월 말 팔켄하인은 물러나고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뒤를 이었으며, 프랑스군은 10월 24일 두오몽을, 11월 2일 보를 되찾았습니다. 12월 싸움이 끝났을 때 양쪽 사상자는 합쳐 70만 명 안팎이었고 그 가운데 30만 명 가까이가 죽었습니다. 전선은 2월과 거의 같은 자리였습니다.
갈림길
가장 위태로운 순간은 공세 초기였습니다. 두오몽이 떨어진 2월 24~25일, 프랑스 사령부 안에서는 뫼즈 강 오른쪽 둑을 버리고 물러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조프르의 참모장 카스텔노가 오른쪽 둑을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군이 처음에 강 동쪽 둑만 공격한 것이 실수였다는 비판은 당시 공세를 맡은 독일 황태자 쪽에서도 나왔습니다. 신성한 길이 끊겼다면 베르됭의 수비대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르됭을 잃었다고 프랑스가 꺾였을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팔켄하인은 전쟁이 끝난 뒤 쓴 회고록에서 처음부터 도시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피를 말리는 것이 목표였다고 주장했지만, 그 근거로 든 「크리스마스 각서」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폴리와 홀거 아플러바흐 같은 역사가들은 그의 진짜 의도를 두고 논쟁합니다. 영국군은 커지고 있었고 해상 봉쇄는 독일을 조였으며, 프랑스가 베르됭을 잃고도 싸움을 이어 갔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실제로 1917년 봄 니벨 공세가 실패하자 프랑스군 곳곳에서 공격 명령을 거부하는 항명이 일어났다는 점은 프랑스의 한계가 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1916년 2월, 두오몽 요새가 떨어진 뒤 프랑스군의 보급로 「신성한 길」이 포격에 끊겼습니다. 4월, 프랑스군은 뫼즈 강 서쪽으로 물러났고 베르됭이 함락되었습니다. 파리의 정부는 흔들렸고, 병사들 사이에서 더는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게임에서는 프랑스의 군대가 크게 줄고 독일의 군대가 늘어나며, 7월 솜 강의 영국군 공세는 반쯤 비어 버린 프랑스 쪽 날개 때문에 첫 주에 멈춥니다.
게임의 바뀐 세계에서 1917년 봄 베르됭을 잃은 프랑스 병사들은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는 휴전을 청합니다. 여름에는 영국도 브뤼셀의 회의 탁자에 앉습니다. 브뤼셀 강화로 독일은 로렌의 철광 지대를 가져가고 벨기에를 보호국으로 삼으며, 미국은 끝내 전쟁에 들지 않습니다. 1918년에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브레스트에서 강화에 서명하고, 독일은 폴란드에 섭정 왕국을 세우고 발트 해 연안을 군정 아래 둡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맺어지지 않습니다.
게임 밖에서 보면, 1917년에 독일이 이긴 유럽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그대로 남은 유럽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독일은 1917~1918년 동쪽의 점령지에 섭정 왕국과 보호국들을 세우는 계획을 실제로 추진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베르사유에 대한 원한도, 그 원한을 먹고 자란 정치 운동도 이 세계에는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패전국 프랑스의 배상과 복수심이 유럽의 새 불씨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베르됭은 게임의 마지막 갈림길이며, 1914년 7월 위기가 실제처럼 전쟁으로 번진 세계에서만 일어납니다. 외교가 위기를 막아 낸 세계에서는 대전쟁도 베르됭도 없습니다. 7월 위기의 판세는 다시 1870년 보불 전쟁과 크림 전쟁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베르됭은 프랑스인에게 대전쟁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전장의 두오몽 납골당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13만여 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1984년 미테랑 대통령과 콜 총리가 이곳에서 손을 맞잡았습니다. 베르됭을 지킨 페탱은 국민 영웅이 되었다가, 1940년 패전 뒤 비시 정권의 수반이 되었습니다.
- 영향을 준 갈림길 만약 1914년 7월 위기가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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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청기사파 화가 프란츠 마르크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8월의 총성을 고르세요. 1915년 「위장 천막」에서 포대를 덮을 천막에 위에서 보이지 않게 무늬를 그리면 베르됭 공세가 이길 판세가 오르고, 다른 포대에도 그리는 법을 가르치면 크게 오릅니다. 프란츠 마르크는 실제로 위장 천막을 그렸고, 1916년 3월 베르됭 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다른 자리에서 시작했다면, 1915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쪽 사람은 포탄 공장이나 철도 일에 나가거나 전쟁 공채를 사서 공세를 도울 수 있고, 프랑스 쪽 사람은 신성한 길의 화물차 운전이나 길 공사에 나서거나 국방 공채를 사서 베르됭을 지킬 수 있습니다. 판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영국의 힘을 견주어 정해집니다.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플레이어가 독일이나 프랑스를 다스리고 있으면 갈림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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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전투에서 몇 명이 죽었습니까?
추정마다 다르지만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프랑스군 약 37만 명, 독일군 약 33만 명의 사상자를 내어 합쳐 70만 명 안팎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었고, 그 가운데 전사자는 30만 명 가까이로 봅니다.
「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는 누구의 말입니까?
1916년 6월 베르됭을 지휘한 로베르 니벨 장군의 일일 명령에서 나온 말로 알려져 있으며, 흔히 페탱의 말로도 전해집니다. 이 말은 그 뒤 프랑스 방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팔켄하인은 정말 프랑스의 「피를 말리려」 했습니까?
그는 1920년 회고록에서 그렇게 주장했지만, 근거로 든 1915년 크리스마스 무렵의 각서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소모전이 처음부터 목표였는지, 공세가 실패한 뒤 붙인 설명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에리히 폰 팔켄하인, 『최고 사령부, 1914~1916』; 필리프 페탱, 『베르됭』. 현대 연구: 앨리스테어 혼(Alistair Horne), 『영광의 대가』(The Price of Glory); 로버트 폴리(Rober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폴 잔코프스키(Paul Jankowski), Verdun: The Longest Battle of the Great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