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과 쟁기게임 시작

만약 크레시에서 프랑스가 이겼다면?

1346년 · 중세 · 크레시 전투 · 고친 날

1346년 8월 크레시에서 잉글랜드의 장궁병은 프랑스 기사들의 돌격을 차례로 꺾었고,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손에 넣었습니다. 필리프 6세가 하룻밤만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음 필리프 6세의 기사들이 크레시 언덕의 장궁병을 꺾을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일어난 일

1337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왕의 가스코뉴 영지를 몰수하자, 어머니 쪽으로 카페 왕가의 피를 이은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관을 요구하며 전쟁에 나섰습니다. 백년전쟁의 시작입니다.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무너뜨린 에드워드는 1346년 7월 노르망디의 생바스트라우그에 상륙해 캉을 약탈하고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프랑스군에 쫓기던 그는 8월 24일 솜 강 하구의 블랑슈타크 여울을 건넜습니다.

8월 26일, 에드워드는 크레시 마을과 와디쿠르 사이의 능선에 진을 쳤습니다.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해 장궁병과 함께 세운 방어 대형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행군해 온 필리프는 늦은 오후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앞장선 제노바 석궁병들은 장궁의 빠른 화살에 밀려 물러났고, 뒤에서 달려 나온 프랑스 기사들은 그들을 짓밟으며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프루아사르는 프랑스 기사들이 밤까지 열다섯 번 넘게 돌격했다고 씁니다.

프랑스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눈먼 보헤미아 왕 요한, 왕의 동생 알랑송 백작, 플랑드르 백작, 로렌 공작이 전사했고, 잉글랜드의 전령관들은 웨일스 공의 부대 앞에서만 기사와 종자 1,500여 명의 시신을 세었다고 전합니다. 필리프는 밤중에 라 브루아 성으로 달아났습니다.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올라가 1346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칼레를 포위해 차지했고, 칼레는 그 뒤 200년 넘게 잉글랜드의 땅으로 남았습니다.

갈림길

프랑스의 패배는 서두름에서 나왔다는 것이 오래된 평가입니다. 장 르 벨과 프루아사르는 필리프가 군대를 멈추고 다음 날 싸우라고 명령했지만 앞줄의 귀족들이 서로 앞서려고 밀고 나갔다고 전합니다. 석궁병들은 긴 행군 끝에 지쳐 있었고, 몸을 가릴 큰 방패 파비스는 짐수레와 함께 뒤에 있었으며, 싸움 직전 쏟아진 소나기가 활줄을 적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반대로 에드워드의 군대는 6주의 행군 끝에 먹을 것이 모자랐고, 프랑스군이 하루 이틀 길을 막고 기다렸다면 불리한 곳에서 싸우거나 굶주릴 수도 있었습니다.

앤드루 에이턴과 필립 프레스턴의 연구는 에드워드가 처음부터 싸움을 바랐고 자리를 잘 골랐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장궁과 하마 기사의 결합은 1330년대 스코틀랜드 전쟁에서 이미 시험된 전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하루를 기다렸더라도 언덕 위의 잉글랜드군을 정면으로 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갈림길은 프랑스 왕이 그 하룻밤을 어떻게 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1346년 8월 26일, 필리프 6세는 비에 젖은 석궁병을 앞세우지 말라는 늙은 기사들의 말을 듣고 하룻밤을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새벽 화살이 떨어진 잉글랜드 진을 프랑스 기사들이 양쪽에서 덮쳤습니다. 열여섯 살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사로잡혔고, 그 아버지는 몸값과 휴전을 청했습니다. 칼레는 포위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서는 잉글랜드의 군대가 크게 줄고, 두 나라는 9년의 휴전에 들어가며, 브르타뉴는 프랑스 편의 샤를 드 블루아에게 돌아갑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으로 시작한 플레이어에게 바뀐 세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크레시의 승전보가 브르타뉴에 닿고, 1347년 샤를 드 블루아는 라 로슈데리앙에서 잉글랜드의 토머스 대그워스를 사로잡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그곳에서 블루아가 대그워스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뒤 게클랭은 브르타뉴의 원수가 되고, 1365년에는 키프로스 왕 피에르 1세의 알렉산드리아 원정에 기사들이 몰리며, 1366년부터는 카스티야의 두 왕 사이의 싸움에 용병들을 이끌고 피레네를 넘습니다. 흑태자는 사로잡힌 뒤 다시 바다를 건너지 않았으므로 페드로 왕을 도우러 올 사람은 없습니다.

게임 밖에서 보면, 크레시의 승리는 전쟁을 끝내기보다 잉글랜드의 공세를 한 세대쯤 늦추었을 것입니다. 1347년 가을 흑사병이 남쪽 항구에 닿는 것은 두 세계가 같고, 그 뒤 수십 년 동안 어느 왕국도 큰 원정을 꾸릴 여력이 없었습니다. 칼레라는 발판과 포로가 된 왕세자는 잉글랜드가 다음 싸움을 고르는 셈법을 크게 바꾸었을 것입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크레시는 같은 시대의 마지막 갈림길인 1429년 오를레앙의 판세를 바꿉니다. 프랑스가 크레시에서 이긴 세계에서는 오를레앙의 판세를 정할 때 잉글랜드 쪽 힘이 크게 깎이고 프랑스 쪽 힘이 늘어나므로, 오를레앙이 함락될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집니다.

실제 역사에서 크레시는 1356년 푸아티에, 1415년 아쟁쿠르로 이어지는 잉글랜드 장궁의 시대를 열었고, 기사의 돌격이 전쟁을 결정하던 시대가 끝나 가고 있음을 보여 준 싸움으로 기억됩니다. 칼레는 1558년에야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이어진 갈림길

이 갈림길을 플레이하기

1337년 열일곱 살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브로셀리앙드의 검은 개를 고르세요. 1345년 「왕의 소집」에서 패거리를 이끌고 북쪽 왕의 군대로 가면 크레시 판세가 크게 오르고, 브르타뉴에 남아 잉글랜드의 노샘프턴 백작의 수비대를 붙잡아 두어도 판세가 오릅니다.

중세 시대를 다른 자리에서 시작했다면 역사의 흐름 이야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서면 프랑스의 승리를, 잉글랜드 편에 서면 실제 결과를 밀어붙입니다. 1345년에는 프랑스 사람이라면 왕의 군대에 합류하거나 제노바 석궁병의 급료를 보탤 수 있고, 잉글랜드 사람이라면 에드워드 왕의 원정에 이름을 올리거나 화살 값을 낼 수 있습니다. 이 갈림길은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모두 살아 있을 때 열립니다.

이 갈림길 플레이하기 → 시나리오 “브로셀리앙드의 검은 개” 시작하기 →

버튼을 누르면 중세 시대가 선택된 채로 게임이 열립니다. 브라우저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고 계정도 필요 없습니다.

묻고 답하기

크레시에서 장궁은 얼마나 중요했습니까?

매우 중요했지만 그것만으로 이긴 것은 아닙니다. 잉글랜드군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해 장궁병과 함께 세웠으며, 프랑스군은 지친 상태에서 순서 없이 돌격했습니다. 장궁은 분당 여러 발을 쏠 수 있어 석궁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흑태자는 크레시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열여섯 살의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잉글랜드군 오른쪽의 선봉을 맡았습니다. 프루아사르는 그의 부대가 위태로울 때 에드워드 3세가 「그 아이가 박차를 얻게 하라」며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전합니다. 흑태자라는 별명은 그가 죽은 뒤에 붙었습니다.

크레시 뒤 백년전쟁은 어떻게 흘렀습니까?

에드워드는 칼레를 차지했고, 1347년 휴전과 흑사병으로 전쟁이 잠시 멈췄습니다. 1356년 푸아티에에서는 흑태자가 프랑스 왕 장 2세를 사로잡았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아키텐 전체를 얻었습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장 프루아사르, 『연대기』 1권; 장 르 벨, 『참된 연대기』; 조반니 빌라니, 『신연대기』. 현대 연구: 앤드루 에이턴·필립 프레스턴(Andrew Ayton, Philip Preston), The Battle of Crécy, 1346; 조너선 섬션(Jonathan Sumption), The Hundred Years War 1권 Trial by Battle.

반사실 역사는 근거를 갖춘 추측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실제 역사를,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는 게임에 담긴 것을 포함해 개연성 있는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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