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해럴드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이겼다면?
해럴드 고드윈슨은 스탬퍼드 다리에서 한 침략자를 물리쳤지만 헤이스팅스에서 다음 침략자에게 졌습니다. 둘 다 물리쳤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참회왕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5일에 죽자, 웨섹스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이 이튿날 왕관을 썼습니다. 왕위를 노리는 경쟁자가 둘 있었습니다. 에드워드와 해럴드 자신이 왕위를 약속했다고 주장한 노르망디 공 윌리엄, 그리고 해럴드의 망명한 동생 토스티그와 손잡은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입니다.
하르드라다가 먼저 북쪽에 상륙해 9월 20일 풀퍼드에서 이겼지만, 남쪽에서 급히 달려온 해럴드에게 허를 찔려 9월 25일 스탬퍼드 다리에서 토스티그와 함께 전사했습니다. 사흘 뒤 윌리엄이 페븐지에 상륙했습니다. 해럴드는 서둘러 런던으로, 다시 서식스로 내려가 10월 14일 헤이스팅스 근처, 훗날 배틀이라 불리게 된 곳의 능선에서 싸움에 나섰습니다.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은 노르만의 궁수와 보병, 기병을 상대로 하루 대부분을 버텼습니다. 노르만 저술가들은 거짓 퇴각으로 잉글랜드 대열 일부를 비탈 아래로 끌어냈다고 쓰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도된 것이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해 질 무렵 해럴드가 전사했고(바이외 태피스트리의 눈에 박힌 화살은 여러 전승 가운데 하나입니다), 잉글랜드군은 무너졌습니다. 윌리엄은 1066년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했습니다.
갈림길
헤이스팅스는 중세 전투로서는 드물게 길고 팽팽했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는 선택은 왕국의 병력을 다 모으기 전에 서둘러 싸우기로 한 해럴드의 결정입니다. 기다렸다면 더 큰 군대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황폐해진 서식스에서 현지 조달로 버티던 윌리엄의 군대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몇 주 동안 윌리엄을 항구에 묶어 두어 그의 상륙을 스탬퍼드 다리 전투 이전이 아니라 이후로 만든 바람도 또 하나의 우연입니다.
무엇보다 이 전투는 방패벽의 규율과 해럴드의 목숨에 달려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대열이 해 질 녘까지 능선을 지켰다면, 윌리엄은 지친 군대를 데리고 적지에서 밤을 맞아야 했을 것이고 잉글랜드 왕은 여전히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하르드라다는 스탬퍼드 다리에서 쓰러졌고, 3주 뒤 센락 언덕의 방패벽은 거짓 퇴각에도 언덕을 내려가지 않았으며, 해 질 녘 노르만 기사들은 배로 물러났습니다. 고드윈 가문의 왕이 잉글랜드를 지켰습니다. 게임은 그 뒤에 이어지는 정복의 역사 사건을 없앱니다.
게임 밖에서 보면, 노르만 정복이 없는 잉글랜드는 고대 잉글랜드의 귀족층과 교회 지도층을 그대로 지켰을 것이고, 스칸디나비아와의 유대가 프랑스와의 유대만큼 무거웠을지도 모릅니다. 영어는 더 천천히 바뀌고 프랑스어 낱말을 훨씬 적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성곽 건설, 둠즈데이 조사, 프랑스어를 쓰는 새 지배층도 그런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협을 사이에 둔 앵글로-노르만 왕국도 없었을 테니, 프랑스 안의 앙주 제국도, 훗날 백년전쟁의 불씨가 된 왕위 주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럴드의 자리가 안전했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윌리엄이 다시 쳐들어왔을 수도 있고, 고드윈 가문에는 나라 안에도 적이 많았습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게임에서 헤이스팅스는 878년 에딩턴에서 웨섹스가 살아남았을 때만 일어납니다. 데인인의 잉글랜드에는 1066년의 위기가 없습니다.
중세(1200년)로 이어 가면 잉글랜드는 고드윈 가문이 다스리고 프랑스에 땅이 없습니다. 노르망디는 여전히 프랑스 왕의 봉신 공국입니다. 이는 다시 부빈의 무대를 바꿉니다. 부빈은 잉글랜드가 노르망디, 앙주, 푸아투 가운데 한 곳을 갖고 있어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영향을 준 갈림길 만약 앨프레드 대왕이 에딩턴에서 졌다면?
-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것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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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과 대관의 시대로 시작하거나, 1065년 노르망디에서 시작하는 시나리오 정복자의 동료를 고르세요. 역사의 흐름 이야기 1066년에서 해럴드의 친위병이 되거나, 하르드라다의 함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거나, 윌리엄의 기사로 달릴 수 있습니다.
양쪽이 엇비슷한 세력으로 다뤄지므로 어느 편을 고르는지,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실제로 큰 무게를 갖습니다. 역사를 바꾸려면 해럴드 곁에 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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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는 정말 눈에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까?
바이외 태피스트리에는 그렇게 보이는 장면이 있지만, 그 인물은 복원 과정에서 손질되었을 수 있고 초기 사료들도 엇갈립니다. 노르만 기사들에게 베여 쓰러졌다고 쓴 기록도 있습니다. 역사가들도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해럴드는 왜 스탬퍼드 다리 전투 직후에 그렇게 서둘러 싸웠습니까?
윌리엄이 자신의 백작령인 웨섹스를 약탈하는 것을 막고, 하르드라다를 상대로 통했던 기습을 되풀이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병력을 더 기다렸어야 했다고 봅니다.
1066년 잉글랜드 왕위에 가장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분명한 규칙은 없었습니다. 해럴드는 잉글랜드 귀족들이 뽑았고 에드워드가 임종 때 지명했습니다. 윌리엄은 예전의 약속과 해럴드의 맹세를 내세웠고, 하르드라다는 오래된 협약에 기댔으며, 혈통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에드거 애셀링이었습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앵글로색슨 연대기』; 푸아티에의 기욤, 『윌리엄의 업적』; 바이외 태피스트리. 현대 연구: 마크 모리스(Marc Morris), The Norman Conquest; 프랭크 발로(Frank Barlow), The Godwins; 스티븐 모릴로(Stephen Morillo) 엮음, The Battle of Hastings: Sources and Interpret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