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845년 바이킹이 파리를 차지했다면?
845년 부활절, 덴마크인 선단이 센 강을 거슬러 파리를 털었고 대머리왕 카롤루스는 은 7천 파운드를 주고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이 은 대신 센 강에 눌러앉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손자 셋에게 나뉘었고, 서프랑크는 막내 대머리왕 카롤루스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국을 온전히 쥐지 못했습니다. 아키텐에서는 조카 피피누스 2세가 왕을 자처했고, 브르타뉴의 노미노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며, 형제 왕들과의 싸움에 지친 귀족들은 왕의 부름에 늦게 왔습니다. 그사이 북쪽의 덴마크인들은 해마다 강을 거슬러 올라와 수도원과 도시를 털었습니다. 841년에는 루앙이 약탈당했습니다.
845년 3월, 프랑크 연대기들이 레기네리우스라 부르는 덴마크인 지도자가 120척의 배를 이끌고 센 강을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카롤루스는 군대를 강 양쪽으로 나눴다가 한쪽을 잃었고, 사로잡힌 포로 111명이 강가에서 목매달렸다고 전합니다. 덴마크인들은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털고 3월 28일 부활절에 파리에 들어갔습니다.
왕은 생드니에 머문 채 싸우지 않고 은 7천 파운드를 내주었고, 덴마크인들은 강을 내려갔습니다. 서프랑크 왕이 바이킹에게 돈을 주고 물러가게 한 여러 차례 가운데 첫 번째였습니다. 돌아가는 배에는 이질이 돌았다고 하며, 수도사들은 이를 성 제르맹의 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몇몇 연구자는 이 레기네리우스를 전설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갈림길
845년은 카롤루스에게 최악의 해였습니다. 같은 해 6월 그는 피피누스 2세를 아키텐 왕으로 인정해야 했고, 11월에는 발롱에서 노미노에에게 졌습니다. 같은 해 덴마크 왕 호리크의 선단은 함부르크를 불태웠습니다. 귀족들이 오지 않는 왕이 은을 주지 않았다면, 덴마크인들이 섬 위의 도시에서 겨울을 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파리는 아직 왕국의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카롤링거 왕들은 콩피에뉴나 아헨 같은 궁정을 옮겨 다녔고, 파리는 성벽이 낡은 주교 도시이자 수도원들의 중심지였습니다. 사이먼 쿠플랜드 같은 연구자들은 몸값 지불이 겁쟁이의 선택이 아니라 시간을 버는 계산된 정책이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덴마크인들은 몇 해 뒤 센 강 하류에서 겨울을 나기 시작했고, 911년 롤로가 센 강 하구를 받아 노르망디가 생겼습니다. 이 갈림길이 묻는 것은 그 일이 66년 앞당겨졌다면입니다.
그랬을지도 모를 세계
왕관과 쟁기에서 다른 결과는 이렇게 그려집니다. 845년 부활절, 카롤루스 왕의 은은 오지 않았습니다. 덴마크인들은 시테 섬에서 겨울을 나고 루앙에 목책을 세웠습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피누스 2세를 왕으로 세웠고, 서프랑크는 셋으로 갈라졌습니다. 게임에서는 서프랑크의 군대가 반으로 줄고, 아키텐과 가스코뉴에 피피누스의 아키텐 왕국이, 노르망디 땅에 로드브로크 가문의 「센 강 왕국」이 섭니다. 911년의 노르망디 건국은 이 세계에서 따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그나르로 시작한 플레이어에게 바뀐 세계는 여섯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파리의 섬을 지킬지 은을 싣고 돌아갈지, 센 강의 겨울에 브르타뉴의 노미노에나 아키텐의 피피누스와 손잡을지, 카롤루스 왕이 보낸 주교들의 세례 제안을 받을지 고릅니다. 854년 덴마크의 호리크 왕이 내전에서 쓰러지자 헤데비의 귀족들이 센 강의 당신을 부르고, 859년에는 아들들과 하스테인이 루앙의 부두에서 남쪽 바다로 떠납니다. 호리크의 죽음과 비요른·하스테인의 지중해 원정은 실제 역사에서도 854년과 859년의 일입니다.
게임 밖에서 보면, 9세기 중반에 센 강 하구에 북쪽 사람들의 나라가 섰다면 서프랑크 왕국은 실제보다 더 약하고 더 쪼개진 채 10세기를 맞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실제 노르망디가 그랬듯 그 정착민들도 몇 세대 안에 세례를 받고 프랑크어를 쓰는 영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을 건너는 파문
같은 시대의 앞 갈림길인 843년 베르됭 조약이 서프랑크 왕국의 처지를 만들었습니다. 제국이 나뉘지 않았다면 카롤루스는 형제들과 싸우느라 지친 귀족들을 이끌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파리는 그 뒤에도 856~857년과 861년에 다시 약탈당했고, 885~886년 대포위 때는 오도 백작이 도시를 지켜 냈습니다. 이 방어로 이름을 얻은 오도는 888년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고, 그의 집안에서 훗날 카페 왕조가 나왔습니다. 파리가 일찍 덴마크인의 손에 넘어간 세계에서는 그 이야기의 출발점이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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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년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로 시작하는 시나리오 라그나르의 배를 고르세요. 헤데비에서 배를 모을 때 호리크 왕에게 센 강으로 갈 허락을 받으면 파리가 떨어질 판세가 조금 오르고, 그해 겨울 「센 강의 지도」에서 겨울을 날 장비와 소를 실으면 크게 오릅니다. 은만 노려 배를 가볍게 하거나 강가 수도원만 털고 빠지면 역사대로 흘러갑니다.
바이킹과 대관의 시대를 다른 자리에서 시작했다면, 서프랑크 쪽 사람은 844년 파리 섬의 다리를 지키는 수비대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의 보물을 생드니로 옮기는 일을 도울 수 있고, 북유럽 문화권 사람은 라그나르의 배에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 갈림길은 서프랑크가 파리를 다스리고 있을 때만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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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년 파리를 친 사람이 정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입니까?
프랑크 연대기는 지도자를 레기네리우스(라그나르)라고 부르지만, 그가 북유럽 사가 속 영웅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가의 라그나르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합쳐진 전설적 인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은 7천 파운드는 얼마나 큰 돈이었습니까?
카롤링거의 파운드는 은 약 400그램 남짓으로 추정되므로 2톤을 훌쩍 넘는 은입니다. 은화로 치면 160만 닢이 넘는 양으로, 서프랑크 왕국이 한 번에 내기에는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바이킹은 언제 센 강에 정착했습니까?
850년대부터 센 강 하류의 섬들에서 겨울을 나기 시작했고, 911년 무렵 샤를 단순왕이 생클레르쉬레프트에서 롤로에게 루앙 둘레의 땅을 주면서 노르망디가 생겼습니다.
참고 자료와 더 읽을거리
『생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 845년; 『크산텐 연대기』; 『성 제르맹 유해 이전기』(Translatio sancti Germani). 현대 연구: 재닛 넬슨(Janet Nelson), Charles the Bald; 사이먼 쿠플랜드(Simon Coupland), 「The Frankish Tribute Payments to the Vikings and their Consequ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