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모 데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1389년~1464년)는 메디치 은행을 이끈 피렌체의 은행가이자 정치가로, 공화국의 공직을 거의 맡지 않으면서도 1434년부터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습니다. 1433년 알비치파에게 체포되어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같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해 르네상스 피렌체의 바탕을 놓았습니다. 죽은 뒤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 생몰 | 1389년 – 1464년 |
|---|---|
| 활동한 곳 | 피렌체 · 파도바와 베네치아(망명) |
| 알려진 일 | 메디치 은행, 르네상스의 후원자, 「조국의 아버지」 |
| 게임 시작 | 1433년 · 44세 · 메디치 은행의 주인(평민 은행가) — 꽃의 도시의 장부 |
생애 요약
- 1389년 9월 27일 피렌체에서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 1429년 아버지가 죽고, 교황청의 자금을 맡는 메디치 은행을 물려받습니다.
- 1433년 루카와의 전쟁이 실패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9월 7일 리날도 델리 알비치 쪽 시뇨리아에 체포되어 베키오 궁의 탑에 갇혔다가, 파도바로 10년 추방됩니다.
- 1434년 메디치 쪽 시뇨리아가 뽑히자 10월 피렌체로 돌아오고, 알비치파가 추방됩니다.
- 1436년 브루넬레스키의 대성당 돔이 완성되어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가 대성당을 봉헌합니다.
- 1439년 동서 교회의 통합을 논의하는 공의회를 피렌체로 옮겨 오는 데 돈을 대고, 비잔티움 황제 요안네스 8세를 맞습니다.
- 1440년 앙기아리 전투에서 밀라노군을 물리칩니다.
- 1444년경 미켈로초에게 메디치 궁을 짓게 하고, 산 마르코 수도원에 누구나 쓸 수 있는 도서관을 엽니다.
- 1454년 1450년 자신이 돈을 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된 뒤, 로디의 평화로 이탈리아의 세력 균형이 섭니다.
- 1464년 8월 1일 카레지의 별장에서 죽고, 시뇨리아는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줍니다.
가족
게임에서 이 인물로 시작할 때 함께 나오는 가족입니다. 연도는 역사 기록을 따랐고, 전하지 않는 것은 ?로 두었습니다.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아버지 |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 1360년 – 1429년 | 메디치 은행을 세운 은행가 |
| 어머니 | 피카르다 부에리 | ? – 1433년 | |
| 동생 | 로렌초 | 1395년 – 1440년 | 은행을 함께 경영 |
| 아내 | 콘테시나 데 바르디 | 1390년경 – 1473년 | 은행가 바르디 가문의 딸 |
| 아들 | 피에로 | 1416년 – 1469년 | 「통풍 환자」 피에로. 아버지를 이어 피렌체를 이끔, 위대한 로렌초의 아버지 |
| 아들 | 조반니 | 1421년 – 1463년 | 은행 경영을 맡았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 |
게임에서는
1433년 9월, 피렌체에서 마흔네 살의 은행가로 시작합니다. 땅도 작위도 없는 평민이지만 교황청의 장부와 여러 도시의 지점, 넉넉한 금화와 지략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시뇨리아가 당신을 베키오 궁으로 불렀고, 첫 사건은 당신이 갇힌 탑 「알베르게티노」입니다.
갈림길은 「코시모가 돌아오지 못했다면」입니다. 탑 안에서 곤팔로니에레에게 금화를 보낼지, 베네치아의 벗들에게 편지를 빼돌릴지, 그리고 망명지에서 보낸 한 해가 메디치파와 알비치파의 판세를 움직입니다. 1434년에 돌아오면 공의회와 앙기아리, 밀라노의 계승과 로디의 평화를 지나 「조국의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돌아오지 못하면 베네치아 석호의 망명객으로 사는 다른 줄기가 결말까지 이어집니다.
아내 콘테시나, 몸이 약한 맏아들 피에로와 둘째 조반니, 동생 로렌초가 곁에 있습니다. 결말은 1464년이고, 후계자의 세대에는 1478년 파치 음모가 기다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코시모는 왜 「조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나요?
그가 죽은 뒤 피렌체 시뇨리아가 30년 동안의 평화와 번영을 기려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주었고, 산 로렌초 성당의 무덤에도 그렇게 새겼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키케로와 아우구스투스가 받았던 칭호입니다.
코시모는 왜 체포되고 추방되었나요?
1429년에 시작된 루카와의 전쟁이 실패하자, 권력을 쥐고 있던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그 책임을 메디치에게 돌리고 커져 가는 메디치의 세력을 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사형을 바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판결은 파도바로의 10년 추방이었고, 돈을 써서 형을 가볍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코시모는 르네상스에 어떤 역할을 했나요?
브루넬레스키의 산 로렌초 성당, 미켈로초의 메디치 궁과 산 마르코 수도원(프라 안젤리코의 벽화), 도나텔로의 작품을 후원했고, 고전 사본을 모아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 카레지의 별장을 내주어 플라톤 저작을 라틴어로 옮기게 한 일은 피렌체 플라톤주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참고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 『명사 열전』,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사』 4~7권, 일반 르네상스사 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