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데물랭
카미유 데물랭(1760년~1794년)은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정치가입니다. 1789년 7월 12일 파리 팔레루아얄의 카페 드 푸아 앞에서 군중에게 무기를 들라고 외쳐 이틀 뒤 바스티유 습격으로 이어진 봉기에 불을 붙였고, 신문으로 이름을 얻어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1793년 겨울 신문 「르 비외 코르들리에」로 공포정치를 누그러뜨리자고 호소하다 1794년 4월 5일 당통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 생몰 | 1760년 – 1794년 |
|---|---|
| 활동한 곳 | 피카르디(기즈) · 파리 |
| 알려진 일 | 바스티유 전야의 연설, 「르 비외 코르들리에」 |
| 게임 시작 | 1789년 · 29세 · 파리의 기자이자 변호사(평민) — 카페 드 푸아의 탁자 |
생애 요약
- 1760년 3월 2일 피카르디의 기즈에서 바이아주 법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장학생으로 파리의 루이르그랑 학교에 다니며 로베스피에르와 동창이 됩니다.
- 1785년 파리 고등법원의 변호사가 되지만, 말을 더듬어 법정에서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 1789년 7월 12일 네케르 해임 소식에 팔레루아얄의 탁자 위에서 무기를 들라고 외칩니다. 이틀 뒤 바스티유가 무너지고, 그해 소책자와 신문 「프랑스와 브라방의 혁명」으로 이름을 얻습니다.
- 1790년 12월 29일 생쉴피스 성당에서 뤼실 뒤플레시와 혼인하고, 로베스피에르가 증인으로 섭니다.
- 1791년 7월 샹드마르스 학살 뒤 체포를 피해 한동안 몸을 숨깁니다.
-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 습격에 가담하고, 법무장관이 된 당통의 비서를 거쳐 9월 국민공회 의원에 뽑힙니다. 7월에는 아들 오라스가 태어납니다.
- 1793년 5월 「브리소파의 역사」로 지롱드파를 공격하고, 12월 신문 「르 비외 코르들리에」를 내어 관용 위원회를 두자고 호소합니다.
- 1794년 1월 자코뱅 클럽에서 신문을 불태우자는 로베스피에르에게 「태우는 것은 대답이 아니다」라고 맞섭니다. 3월 30일 밤 체포되어 4월 5일 당통과 함께 처형되고, 뤼실도 4월 13일 단두대에 오릅니다.
가족
게임에서 이 인물로 시작할 때 함께 나오는 가족입니다. 연도는 역사 기록을 따랐고, 전하지 않는 것은 ?로 두었습니다.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아버지 | 장브누아 데물랭 | 생몰년 미상 | 기즈 바이아주의 법관 |
| 어머니 | 마리마들렌 고다르 | 생몰년 미상 | |
| 아내 | 뤼실 뒤플레시 | 1770년 – 1794년 | 1790년 혼인. 남편이 처형된 여드레 뒤 단두대에 오름 |
| 아들 | 오라스 | 1792년 – 1825년 | 1792년 태어남. 훗날 아이티로 건너가 그곳에서 죽음 |
게임에서는
1789년 7월 12일 일요일, 파리 팔레루아얄에서 스물아홉 살의 기자이자 변호사로 시작합니다. 왕이 재무총감 네케르를 내쫓았다는 소식이 정원을 채우고, 누군가 당신을 카페 드 푸아의 탁자 쪽으로 밉니다. 주머니에는 권총 두 자루가 있습니다. 아직 혼인하지 않았고,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몇 해째 당신을 사위로 받아 주지 않는 집안의 딸 뤼실이 이 삶의 사람들입니다.
첫 사건 「카페 드 푸아의 탁자」에서 「무기를 들라!」고 외치고 밤나무 잎을 모자에 달면 명성을 크게 얻습니다. 이 삶에서는 지략과 명성이 무기이고, 「브리소파의 역사」와 「늙은 코르들리에」처럼 무엇을 쓰는지가 벗과 적을 정합니다.
갈림길은 「혁명의 운명」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7월 14일, 생쉴피스의 혼인, 샹드마르스, 8월 10일, 왕의 재판, 「늙은 코르들리에」를 지나 1794년 3월 30일 밤의 고비를 넘지 못하면 혁명 광장의 수레로 이야기가 끝나고, 넘기면 테르미도르와 브뤼메르를 지나 1804년 대관식의 해까지 갑니다. 대불 동맹이 파리에 들어가면 망명지의 인쇄기와 랭스의 소년 왕으로 이어지는 다른 줄기가 열립니다.
- 시나리오 안내 카페 드 푸아의 탁자
- 시대 안내 혁명의 시대
- 관련 갈림길 만약 대불 동맹이 프랑스 혁명을 짓밟았다면?
자주 묻는 질문
카미유 데물랭은 왜 처형되었나요?
1793년 겨울 신문 「르 비외 코르들리에」로 공포정치를 늦추고 갇힌 혐의자들을 풀어 줄 관용 위원회를 두자고 호소해 공안위원회와 맞섰기 때문입니다. 당통과 함께 「관용파」로 몰려 1794년 3월 30일 밤 체포되었고, 혁명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4월 5일 처형되었습니다.
데물랭은 바스티유 습격과 어떤 관계인가요?
1789년 7월 12일 팔레루아얄에서 군중에게 무기를 들라고 외친 연설이 파리의 봉기에 불을 붙였고, 그 봉기가 이틀 뒤 바스티유 습격으로 이어졌습니다. 바스티유 습격을 직접 이끈 것은 아니지만, 혁명의 첫 외침을 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데물랭과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사이였나요?
루이르그랑 학교의 동창이자 오랜 벗으로, 로베스피에르는 데물랭의 혼인 증인이자 아들 오라스의 대부였습니다. 그러나 1794년 데물랭이 관용을 호소하며 공안위원회를 비판하자 사이가 갈라졌고,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그의 체포를 막지 않았습니다.
참고
카미유 데물랭 「르 비외 코르들리에」, 일반 프랑스 혁명사 개론.